1) 불교란 어떤 종교인가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며,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종교’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부처님’이라 부르고, 다르게는 ‘붓다’ 또는 그냥 ‘불’이라고 하는 말은 고대 인도어의 'buddha'의 음을 따온 것으로 ‘깨달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이때 깨달음의 내용은 인생 내지는 사회에 대한 모든 진리를 말한다. 따라서 그 ‘가르침’ 또한 인생과 사회에 대한 깨달음 내지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처님이 약 2천5백여 년 전에 인도의 석가족 출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불교란 기본적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개조로 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여 인격의 완성을 이루고, 부처님이 도달하신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 즉 ‘성불’을 목표로 하는 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역사의 진행과 더불어 불교 또한 많은 지역에 전파되면서 사상적으로도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 발전하였다.
일반적으로 불교를 지역에 따라 구분할 때는, 크게 남방 불교와 북방 불교로 나눈다.
남방 불교는 ‘상좌부 불교’ 또는 ‘팔리 불교’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도 본토에서 남쪽으로 전파된 것을 말한다. 현재의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 등의 불교가 그것이다.
북방 불교는 인도에서 북쪽으로 전파된 불교로, 중국•티베트•한국•일본의 불교를 말한다.
또한 불교를 내용에 따라 구분할 때는 크게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로 나눈다.
소승 불교는 주로 남방에 전해진 불교로서, 사성제와 팔정도를 주요한 수행의 덕목으로 삼아, 각자 자기의 삶에 있어서의 문제 해결과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는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형식화되어 중생을 지도하고 교화하는 본래의 역할을 상실해 갔다.
대승 불교는 이러한 기존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입장의 불교 운동이다. 그들은 기존의 불교를 소승(중생을 태워서 피안에 건네주기 위한 작은 차)이라고 비판하면서 육바라밀을 독자적인 수행법으로 제창하고, 대승(중생을 태워서 피안에 건네주기 위한 큰 차)이라고 이름 하였다.
육바라밀, 즉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에는 팔정도의 내용을 모두 갖춤과 동시에 팔정도에 없는 보시와 인욕을 포함하고 있다. 이 보시와 인욕은 대사회적인 덕목으로, 자기 개인의 안정과 행복은 물론 타인의 행복과 이익을 기원하는 이타정신이다. 따라서 대승 불교에서는 이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의 수행자이며, 그가 바로 ‘보살’이라고 말한다.
2) 현대사회에서의 불교의 의미
물질만능 시대에 지친 인간들이 서구문화 자체의 한계를 피부로 느끼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하는 경향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 새로운 것을 ‘정신적 안온’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정신적인 면으로 볼 때, 서구인들까지도 호기심을 표하고 있는 동양사상인 불교가 그 중 으뜸이 아닌가 싶다. 불교가 호기심을 끄는 이유와 기대의 내용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불교는 합리주의에 입각한 종교이다.
현대인은 대개 이치로 생각해서 납득이 가지 않으면 수긍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불교는 무엇보다도 독단을 배제하며, 특수한 교리를 가지고 인간을 속박하지 않는다.
불교의 합리적 사고는 인간의 ‘주체성 회복’이라는 문제에도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 불교는 특히 인간의 주체적 인격 완성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를 위한 방법적 체계로서 삼학을 제시한다.
즉 행동의 정화인 계, 정신 통일인 정, 인간의 예지인 혜를 주체적으로 닦아 나가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일체중생 실유불성의 주장은 인간의 주체성 회복이 모든 인류에게 가능함을 천명하는 것이고, 세계인의 관심의 대상이 된 선사상은 ‘자신의 마음을 바로 꿰뚫어 그 참된 성품을 발견함으로써 부처가 된다’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주장하여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둘째 ,불교는 철저히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고등 종교로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세계로 퍼져 나간 유일한 종교가 불교이다. 이는 불교의 자비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이 아님을 실증한다. 불교의 관용적 태도는 다른 종교와의 대립을 없애고, 세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건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그 기초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불교의 중도사상이다.
중도란 대립된 견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 즐거움과 괴로움 등 일체의 모순을 조화로, 대립을 협동으로, 무지를 지혜로, 분쟁을 평화로 지향하여 승화시키는 것이 중도사상이다.
이렇게 평화의 기반인 중도사상을 체득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팔정도와 육바라밀이며, 이를 구현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보살이다.
팔정도는 자기를 향한 평화 구현의 방도이며, 육바라밀은 남을 향한 평화 구현의 방도이다. 자기를 향한 팔정도가 아울러 중시되는 이유는, 불교가 바라는 진정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각자가 참된 인간으로 복귀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불상생이라는 계율을 실천한다고 해서 인류의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살생을 하지 않음으로써 지켜지는 평화는 각 개인의 안녕과 평안으로 연결되겠지만, 불교에서는 먼저 인간 개개인이 중도의 원리를 깨달아 서로 협조하고 화합하는 보살행을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인류가 직면한 위기와 불행을 극복하고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셋째, 불교는 마음의 깨달음을 이루는 종교이다.
이에 대해서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기심과 욕망과 편견을 제거하고자 하는 불교의 모든 수행은, 일차적으로는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특수한 기법이나 가혹한 시련을 요구하지 않는 불교적 명상법을 통해 누구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현대인은 특히 이부분에 관심을 갖는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만족을 느끼고 있을지 모르나 마음은 매우 거칠어져 있음을 우리는 스스로 알고 있다. 그래서 갈수록 불교의 수양의 생활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에 부응하여, 불교는 그 전통적인 가치 체계를 새롭게 평가하고, 일반 민중들의 풍습과 생활 형태를 재음미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불교는 살아 있는 종교로서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다. 우리 불자들은 일체의 집착이나 편견을 떨쳐버린다는 불교 본래의 입장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자들은 습관적인 말버릇이나 무의식중에 내재되어 있는 편견을 반성하고, 넓고도 높은 깨달음의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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